순수의 시대, 고민시
새하얀 묵직함을 바탕으로 고민시의 시대는 흐른다.
어제도 하루 종일 촬영했다면서요. 하하. 갑자기 비가 오는 바람에 종일 비 맞으면서 촬영했죠.
이동이 많은 야외 촬영이었다던데, 피곤하진 않아요?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피곤함은 덜해요.
인스타그램에 남긴 것처럼 ‘요동치는 희로애락’을 느낀 하루였을까요? 비가 와서 다들 서둘렀고 오히려 빨리 끝났으니까?
‘꽃은 땅이 연주하는 음악’이라는 문장도 그렇고, 짧은 표현 하나하나가 왠지 고민시라는 사람을 대변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평소 책 읽는 걸 좋아하는데 요즘은 많이 못 봐요. 차기작 대본을 보는 데 집중하고 있거든요. 계속 수정본이 나와서 다른 글을 읽을 틈이 없어요. 그래도 작품 안 할 때는 대부분의 시간을 책을 읽으면서 보내요. 대본 대신 새로운 글로 머릿속을 채우는 거죠.
어떤 책을 좋아해요? 예전에는 소설을 많이 읽었어요. 마음속 깊숙이 자리한 감정을 꺼낼 수 있는 슬프고 우울한 소설요. 김애란 작가님의 <비행운>을 읽고 펑펑 운 적이 있는데, 그때 깨달았어요. 감정을 쏟아내면 또 다른 에너지를 채울 공간이 생긴다는 걸요. 책을 읽으면서 한바탕 울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요즘은 에세이도 자주 읽어요. 지금 제게 필요한 조언을 얻을 수 있어서.
에세이를 직접 써보는 건 어때요? 소질이 있을 거 같아요. 표현력도 좋고요.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예요. 아직은 풀어낼 이야기가 많지 않으니 먼 훗날을 기약하고 있죠. 데뷔 초에 이보영 선배님이 쓴 책을 읽고 많은 힘을 얻었어요. 해낼 수 있다는 믿음과 의지도 굳어졌고요. 저도 제 이야기로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고 싶어요. 40~50대가 되면 글을 쓸 수 있을 정도의 이야기가 쌓이지 않을까요?
사실 글쓰기는 인정받았어요. 단편영화 <평행소설>을 연출해서 무려 대상도 받았고요. 당시의 저는 대중이 눈여겨봐주었으면, 내 이야기에 귀기울여주었으면 했어요. 많은 오디션을 봤지만 캐스팅까지 이어진 경우가 없어서 더 간절했죠. 그렇게 결심한 게 영화를 만드는 거였어요. 영화를 연출하면서 마음 맞는 사람끼리 일할 수 있어 좋았고, 꿈으로 한발 더 다가간 것 같아 즐거웠어요. 그 덕에 좋은 결과를 얻은 거 같아요.
오늘 화보 콘셉트는 ‘순수의 시대’예요. 개인적으로 ‘고민시’라는 배우를 보면서 바탕이 깨끗한 배우라는 인상을 받았거든요. 출연한 작품을 볼 때면 어떤 배역이든 그 배역만이 화면을 채워요. 고민시라는 개인의 정형화된 이미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달까. 그래서 한편으론 오늘 촬영이 심심하면 어쩌지 걱정했어요. 전혀요. 전 이런 콘셉트 정말 좋아요. 화려한 옷도 입어보고 단발이나 쇼트커트 같은 헤어스타일도 해봤는데 이런 콘셉트는 처음이거든요. 평소에 깨끗하고 깔끔한 무드의 촬영을 해보고 싶던 터라 시안을 받고 기뻤어요.
저런 인상은 저만 받은 게 아닌가 봐요. 역할 대부분이 “너에게 잘 어울리는 역할을 줄게”라는 말과 함께 전달받았다고요? <마녀>의 명희와 <스위트홈>의 은유가 그랬고, 이번 <지리산>의 다원도 그랬죠. 재미있는 건 모두 성격이 다른 캐릭터라는 거예요. <마녀>의 박훈정 감독님이 처음 절 보고 당황하셨대요. 주인공 ‘자윤’을 캐스팅하는 자리였는데, 당시 제가 드라마 <멜로홀릭>에 출연 중이라 히피펌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거든요. 배역과 어울리지 않아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감독님한테 연락을 받고 무척 기뻤어요. “책 받으러 와. 너랑 딱 맞는 캐릭터를 줄게”라고 하시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해요. 명희는 영화에서 대사가 가장 많은 인물이자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중요한 역할이라고 덧붙이셨어요. ‘중요한 역할’이라는 말과 함께 임무를 전달받은 기분이었죠. 반대로 <스위트홈>은 차분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오히려 이응복 감독님은 그런 제 모습에서 은유를 발견하셨나 봐요. 막상 현장에서 밝은 제 모습을 보시고 다원 역을 제안해주셨어요.
<오월의 청춘>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어요. 배우 고민시의 첫 지상파 주연작이기도 하잖아요. 대본을 받자마자 무조건 세상으로 나와야 할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지금 20대인 제가 당시 20대인 명희를 연기하는 게 엄청난 영광이죠. 명희는 그 자체로도 매력적인 캐릭터거든요.
어떤 명희가 되려고 했어요? 이전에 맡은 배역과는 상당히 다른 인물이라 고민을 많이 했어요. 어떻게 하면 이야기에 방해되지 않으면서 명희의 색을 살릴 수 있을지 연구했어요. 그 당시 시대에 대한 다큐멘터리와 책을 보면서 캐릭터를 구축해갔죠. 한강 작가님의 <소년이 온다>가 큰 도움이 됐어요. 그렇게 명희라는 인물의 색을 덧칠해갔어요. 층층이 쌓이는 크레이프 케이크처럼 한 겹씩 색을 얹으면서요.
전라도 사투리는 할 만했어요? 고향이 충청도인데, 충청도와 전라도 사투리가 비슷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생각보다 차이가 크더라고요. 연습만이 살길이라는 생각으로 매일 들으면서 따라 하기를 반복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배경 때문인지 방영 전부터 주목받았어요. 1980년대 5월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대를 담고 있으니까요. 실제로 너무 많은 감정을 쏟아야 해서 힘들었어요. 촬영하는 내내 울고 슬퍼하고, 가슴 아픈 장면이 많으니까요. 그런 감정을 계속 사용하다 보니 작품 밖의 일상에서도 우울하고 어두운 기분을 떨치기 힘들었어요.
결국 명희의 결말을 보고 오열했어요. 명희가 그렇게 될 거라고 예상했는데도요. 다들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전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부터 희생은 희태의 몫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의 주인공 대부분이 남성이고, 또 그 남성의 희생에 대한 서사 중심이잖아요. 그래서인지 <오월의 청춘> 결말이 더 마음에 들어요. 명희의 죽음이 당시의 진짜 광주를 제대로 보여주는 거 같거든요. 평범했던 이들이 희생당한 시절이잖아요.
다른 시대극에서는 어느 시대로 가고 싶어요? 조선 시대나 정통 사극처럼 한복을 입는 시대? 개화기 인물을 연기하고도 싶어요.
<스위트홈2>부터 <밀수>까지. 차기작이 벌써 꽉 찼어요. 작년부터 꾸준히 작품 활동을 했는데, 지친 기색 없이 활기차 보여요. 바쁜 게 좋아요? 네, 좋아요. 올해 처음으로 휴식 기간을 가졌어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쉬는 동안 많이 우울했거든요. 시국이 이렇다 보니 여행도 갈 수 없고요. 할 수 있는 건 집에서 다른 작품을 보는 것뿐인데, 그러면 그 작품 속 인물과 스스로를 비교하게 돼서 침울해져요. 현장에 있으면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좋아요. 일을 하는 동안은 다른 생각하지 않고 연기에만 집중하면 되니까 마음이 편안해지거든요. 작가와 감독, 배우 모두 작품에 필요한 사람들이 모여서 작업하는 거니까 제 존재의 이유에도 확실성이 생기고요.
혼자서도 씩씩할 거 같은데 의외로 혼자일 때 느끼는 외로움과 우울함이 큰가 봐요. 그래서 쉬는 날도 바쁘게 지내요.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스케줄을 만들어놓고요.(웃음) 피부과에 갔다가 운동하러 가고, 영어를 배우거나 베이킹 수업에도 참여하고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정이 빼곡해요. 하루를 꽉 채워서 쓰려고 노력하죠. 삶을 열정적으로 살고 싶고, 또 그렇게 살도록 습관이 몸에 배었어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힘든 일상이지 않을까 걱정도 돼요. 언젠가 방전되는 순간이 찾아오겠죠. 가끔 그런 일이 닥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되기는 해요. 그래도 아직은 괜찮아요. 이렇게 살아야 제 마음이 편하니까요.
혹시 MBTI 물어봐도 돼요? ENTP요. 그런데 할 때마다 바뀌던데요? S가 나오는 날도 있고, I가 나오는 날도 있어요. 자꾸 바뀌니까 MBTI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져요.(웃음) 전 혈액형을 더 믿거든요. 제가 AB형인데, 외향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혼자 있을 때는 생각이 많아지고 고민이 계속 생겨서 그 속으로 점점 매몰되는 타입이에요. 완전 몰입형 인간이거든요.
그래서 운동에 푹 빠진 건가요? 요가와 발레를 오랫동안 했고 등산도 즐긴다고요. 등산을 좋아했는데 얼마 전 등산을 하다가 무릎을 다친 뒤로 잘 안 가요. 그래도 운동하는 건 여전히 재미있어요. 운동이 끝났을 때 느낄 수 있는 에너지도 좋고요. 운동의 중요성을 잘 알거든요. 이렇게 화보 촬영을 하는 날은 더욱 절실하게 느껴요. 운동을 한 날과 하지 않은 날의 차이가 엄청나요. 제 에너지의 원천은 운동과 음식이에요.
어떤 옷도 ‘쿨’하게 입을 수 있는 것 역시 운동 덕분이겠죠? ‘꾸안꾸’ 스타일을 잘 소화하는 것 같아요. 예전엔 주로 트레이닝 슈트를 즐겨 입었어요. 편한 게 우선이었거든요. 어느 순간부터 좀 정돈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것저것 아이템을 찾다 보니 패션에 관심이 많아졌고요. 요즘은 프렌치 시크 스타일에 빠졌어요.
스케줄이 없는 날 고민시의 모습은 어때요? 주로 자외선 차단제만 바르고 다녀요. 외출할 때 모자는 꼭 쓰고요. 메이크업이 필요한 경우에는 눈썹과 립만 바르는 정도? 많이 치장하는 편은 아니에요. 메이크업을 안 할수록 옷을 더 갖춰 입게 되는 거 같아요.
처음엔 왈가닥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직접 보니 다부지고 야무지고 굳센 사람인 거 같아요. 스스로 담담하고 차분한 사람이 되려는 것 같달까? 데뷔 초에는 목소리 톤도 지금보다 훨씬 높았어요. 데시벨도 더 컸고요. 어느 날 드라마를 모니터하는데 제 목소리가 듣기에 너무 거북하더라고요. 듣고 싶은 목소리를 만들기 위해 목소리를 다듬기 시작했는데, 그러면서 성격도 같이 변했어요. 자연스레 차분해졌죠. 엄마가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는데, ‘좋은 일이 있어도 너무 좋아하지 말고 슬픈 일이 있어도 너무 슬퍼하지 말라’예요. 평정심을 유지해야 롱런할 수 있다고요. 그래서 평소엔 담백하게 지내려고 노력해요. 남은 감정은 연기에 쏟으려고요. 균형을 찾는 게 어렵지만요.
다른 인터뷰에서 ‘열 번 넘어져도 한 번의 인정이 있다면 일어설 수 있다’고 한 말이 인상 깊었어요. 최근에 동기 부여가 된 ‘인정’은 뭐였어요? 영화 <밀수>를 촬영하는 동안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잃고 있었어요.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지 방향성에 대한 의문도 들었고요. 그런데 류승완 감독님이 해주신 한마디가 큰 힘이 됐죠. ‘캐릭터를 아주 잘 구현했다고, 연기하는 캐릭터가 매력적이라서 배우마저 매력적으로 보인다’고 말씀해주셨어요. 김혜수 선배님과 염정아 선배님도 같은 칭찬을 해주셨고요. 마음에 확 와닿더라고요. 심적으로 많이 지쳤는데 큰 위로와 힘이 됐어요. 이런 말을 들을수록 더 열심히 살게 되는 거 같아요.
연기를 전공하지 않았어요. 웨딩플래너로서 승승장구하고 있었고요. 그런데 꿈을 위해 모든 걸 포기했어요. 요즘 같은 때 말이에요. 엄청난 결단을 하게 된 기폭제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모든 게 잘 흘러가고 있었어요. 수입도 괜찮았고 나름 승진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스스로 행복한지 물었을 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더라고요. 좋아하는 일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일을 하고 있었던 거죠. 일주일 정도 고민했는데 지금 꿈을 포기하면 후회할 거 같았어요.
지금은 행복해요? 네, 행복해요. 오늘의 고민시는 행복하답니다. 하하.
고민시라는 이름 아래 꽤 많은 작품이 쌓였어요. 지금까지의 결과물에 스스로 점수를 매긴다면요? 음, 85점요. 제 필모그래피가 만족스러워요. 모든 작품과 배역이 좋았거든요. 부족한 점수는 오로지 제 연기력에 대한 점수예요. 아쉬웠던 연기도 있거든요.
다양한 장르와 스펙트럼의 연기를 해왔지만 배역에 대해서는 오랜 갈증이 있다고 들었어요. 전형적인 고정관념에서 탈피한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어요. 배역 그 자체로도 신선하고 새로워서 또 다른 자극이 될 거 같아요. 시나리오에도 유행이 있는데 하나의 작품이 잘되면 유사한 장르가 많아져요. 그런 의미에서 성별이나 역할에 한정되지 않은 이야기가 더 많아졌으면 해요.
예를 들면요? 최근에 영화 <듄>을 봤는데 굉장히 좋았어요. 그런 SF 장르물이나 철학적인 메시지가 담긴 작품도 자주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고민시의 내일은 어떤 색으로 채우고 싶어요? 이렇게 대답해도 되나요? 오로라 같은 컬러를 가진 배우가 되고 싶어요. 배우라는 배경에 있어 어느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다양한 컬러를 가득, 꼭꼭 눌러서 채우고 싶어요.
사진 김선혜
메이크업 오윤희(제니하우스)
헤어 이한별(제니하우스)
스타일리스트 노경언
어시스턴트 공지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