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으로 말해요

가장 선명한 자기표현이 된 요즘 Z세대의 향수 선택법.

Z세대에게 향은 더 이상 ‘좋은 냄새’라는 단순한 범주 안에 머물지 않는다. 그들에게 향은 하루의 기류를 바꾸는 매개이자, 스스로를 해석하는 방식이며, 말로는 다 담기지 않는 감정을 가장 은밀하게 드러내는 언어다. 하루 한 번 그날의 향을 SNS에 공유하는 행위는 이제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의 라이프로그(Life Log)로 자리 잡았다. 실제로 인스타그램과 틱톡에서 SOTD(Scent of the Day) 해시태그 사용량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시코르, 라페르소나, 세포라 등 주요 국내 뷰티 편집 매장 역시 20대 고객의 니치 퍼퓸 구매 비중이 상승하고 있다고 밝힌다. 이런 변화는 향이 한 세대의 정체성과 라이프스타일을 새롭게 규정하는 상징적 장면처럼 읽힌다. 향이 삶의 방식과 자기표현의 중요한 축으로 깊숙이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젠더가 사라진 향, 보더리스 퍼퓸의 부상

이세이미야케 향수 로디세이 오 드 퍼퓸 엥땅스
이세이미야케 향수 로디세이 오 드 퍼퓸 엥땅스 꿈처럼 아름다운 바닷속 장면을 향기로 풀어낸 플로럴 바닐라 향. 100ml 19만7천원

한때 향수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기준 아래 명확하게 두 갈래로 나뉘었다. 여성에게는 샤넬 ‘N°5’나 랑콤 ‘트레조’, 에스티 로더 ‘플레저스’처럼 플로럴·파우더리 계열이 자연스럽게 권장되었고, 남성에게는 CK ‘이스케이프 포 맨’이나 아라미스 ‘클래식’, 휴고 보스 ‘보스 넘버 원’ 같은 시트러스·스파이시·우디 계열이 정석처럼 받아들여졌다. 누가 정한 적도 없지만, 마치 성별이 개성과 취향보다 향을 결정해야 한다는 듯한 관습이 깊이 자리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젊은 세대는 전통적 체계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는다. 2024 유로모니터 글로벌 리포트에서도 프래그런스 시장의 ‘유니섹스(Unisex)’ 카테고리가 최근 몇 년간 가장 빠른 성장세를 보이는 세그먼트로 명시된 것이 이를 방증한다. 향을 고를 때 성별은 고려 요소에서 완전히 빠졌고, 그 자리를 ‘취향’과 ‘개성’, 그리고 ‘현재의 무드’가 대신한다.

르 라보 유칼립투스 20 EDP
르 라보 유칼립투스 20 EDP 유칼립투스와 시더우드의 상쾌함, 라다넘의 따뜻한 레더리함, 머스크의 잔잔한 깊이가 어우러진다. 50ml 31만원.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최근 사랑받는 향의 흐름이다. 르 라보 ‘어나더13’, 바이레도 ‘블랑쉬’, 조 말론 런던 ‘우드 세이지 앤 씨 솔트’, 딥티크 ‘필로시코스’처럼 부드러운 머스크, 맑은 시트러스, 깊은 우디 계열 향조가 ‘남녀 공용’이라는 타이틀보다 ‘내게 맞는 결’을 기준으로 젊은 세대에게 선택된다. Z세대가 이런 선택 기준을 보이는 이유는 명확하다. 예전보다 자기표현에 대한 제한이 완화되고 유연해졌기 때문이다. 성별이 아닌 ‘나라는 사람의 결’을 잘 드러내는 향이 진짜 나와 더 가깝다고 생각하는 것. 따라서 보더리스 퍼퓸(Borderless Perfume) 현상은 단기적 유행이 아닌, 앞으로 향 소비 구조 전반을 재정의하는 새로운 기준선으로 고착될 것으로 보인다.

  감정 기반 향, 무드 퍼퓸의 시대

디올 미스 디올 에쌍스
디올 미스 디올 에쌍스 당당하고 자유로운 여성을 상징하는 향. 달콤한 블랙베리, 우아한 엘더플라워, 풍성한 자스민 부케가 어우러져 강렬함을 안긴다. 50ml 23만1천원

예전에는 향을 고르는 기준이 향조나 지속력에 치우쳤다면, 요즘 세대는 이 향이 지금 나 자신에게 어떤 기분을 가져다주는지를 먼저 떠올린다. 팬데믹 이후 2021년에서 2024년까지 구글 키워드에서 ‘Calm Perfume’ ‘Clean Musk’ ‘Cozy Scent’ 등 감정 기반의 향수 관련 검색어가 꾸준히 상승하는 흐름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는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난 동안 향이 주는 안정감과 분위기 전환 효과를 직접 체감한 사람이 많아졌다는 증거다. 이에 따라 향수 브랜드도 제품을 설명하는 방식을 빠르게 재정립하고 있다. “어떤 사람을 위한 향인지”보다 “이 향은 어떤 감정을 제공하는지”가 커뮤니케이션의 중심이 되는 것.

나르시소 로드리게즈 오 드 퍼퓸 래디언트
나르시소 로드리게즈 오 드 퍼퓸 래디언트 갓 세탁한 이불이 감싸는 듯 보송하고 은은한 클린 코튼 향. 90ml 19만6천원.
루이 비통 퍼퓸 선송
루이 비통 퍼퓸 선송 밝고 화사한 오렌지 블라섬의 향. 화창한 날 기분 좋은 햇살이 피부에 닿는 듯한 기쁨을 연상시킨다. 100ml 가격미정.

예컨대 조 말론 런던 ‘우드 세이지 앤 씨 솔트’는 ‘여유로운 오후의 바닷바람’, 바이레도 ‘블랑쉬’는 ‘맑고 투명한 새하얀 기분’, 르 라보 ‘떼 누아 29’는 ‘고요하지만 짙은 여운’을 핵심 메시지로 내세운다. “제품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 원료나 향조만 나열하기보다, 향이 가진 전체적인 무드와 스토리텔링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비 오는 날’ ‘여유로운 아침’ 같은 정서적 문장으로 소통하고, 더불어 오프라인 매장을 방문하지 못하는 고객을 위해선 온라인에서의 언박싱이나 시향 영상 등 감각적 미리보기 경험을 제공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르 라보 마케팅팀 구슬기 과장은 이처럼 고객과 ‘감정의 접점’을 구축하는 것이 지금의 향 소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전한다. 결론적으로, 감정 기반 향의 확산은 향수 시장이 기능 중심에서 경험 중심으로 이동했음을 상징하며, 이는 향 소비가 앞으로도 정서적 효용을 중심으로 계속 확장될 것임을 시사한다.

  니치 향수의 대중화

탬버린즈 퍼퓸 퍼피
탬버린즈 퍼퓸 퍼피 무릎 위에서 잠든 강아지의 숨결처럼 포근하고 말랑한 감촉이 느껴지며, 고소한 시리얼 향이 부드럽게 퍼진다. 50ml 16만5천원.

니치 향수는 더 이상 ‘아는 사람만의 틈새 취향’이 아니다. 미국 와 영국 <비즈니스 오브 패션(Business of Fashion)>은 니치 브랜드 소비 확산을 향수 시장 성장의 핵심 동력으로 지목하며, 국내 백화점과 편집 매장에서도 니치 카테고리의 빠른 매출 확대를 공식적으로 언급한다. 그 중심에는 MZ세대, 특히 Z세대가 있다. 이들은 향수를 신발이나 가방처럼 ‘상황별 아이템’으로 분류하며 소비한다. 출근용, 휴식용, 소개팅용, 외출용, 자기 전 루틴용처럼 목적에 따라 3~7병을 작은 컬렉션 형태로 구성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다. 니치 향수가 Z세대에게 특별하게 읽히는 이유는 가격이나 희소성 때문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스토리’에 있다. 브랜드의 조향 방식, 원료의 서사, 창립자의 철학, 향이 만들어내는 이미지가 그들의 감정과 미묘하게 연결되기 때문이다. 향을 통해 ‘좀 더 구체적인 나’를 발견하는 과정 자체를 즐거움으로 여긴다.

논픽션 영메모리즈 오드 퍼퓸
논픽션 영메모리즈 오드 퍼퓸 어린 시절의 봄을 닮은 향. 민트와 바질의 싱그러움, 짓이겨진 와일드 플라워가 만드는 생동감이 인상적이다. 50ml 16만2천원.

최근 몇 년 동안 백화점에서 니치 향수 매출이 두드러지게 성장한 것은, 단순한 시장 확대를 넘어 향수가 하나의 취향 경험이자 자기 탐구의 결과물로 소비된다는 변화의 징표다. 그래서 Z세대 대부분이 향수를 하나의 취미처럼 즐기며 자신만의 ‘레이어링 공식’을 완성해간다. 니치 향수의 성장 곡선은 결국 이 세대의 섬세한 감정 관리 방식과 깊이 맞닿아 있다. 이런 흐름은 니치 향수가 더 이상 독립 브랜드만의 영역이 아님을 보여주기도 한다. 디올 이지은 시니어 PR 매니저는 “젠더리스, 니치, 아이콘 라인뿐 아니라 솔리드 퍼퓸, 헤어 미스트 등 리추얼 제품까지 확장해 다양한 Z세대 취향에 대응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니치 소비를 포함해 Z세대의 향수 소비 패턴이 시장 전반의 제품 전략까지 재편하고 있는 것이다.

  향으로 말하는 세대

마티에 프리미에르 바닐라 파우더 엑스트레 드 퍼퓸
마티에 프리미에르 바닐라 파우더 엑스트레 드 퍼퓸 마다가스카르 바닐라에 통카빈 앱솔루트가 더해져 깊고 매혹적인 향. 50ml 39만5천원.

향을 고르고, 뿌리고, 기록하는 과정은 결국 자신을 이해해가는 방식과 닮았다. 경계 없는 향으로 기존의 편견에서 벗어나고, 감정 기반 향으로 하루의 리듬과 기분을 다듬으며, 다양한 니치 향수를 통해 지금의 나를 여러 각도에서 확인한다. 그래서 향수는 더 이상 단순한 취향의 산물이 아니다. 하루의 상태를 점검하고 감정을 조율하는 데 쓰이며, 자신의 정서를 읽어내는 하나의 기준으로 기능한다. ‘무엇을 뿌리는지’가 아니라 ‘왜 그 향을 선택했는지’가 중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Z세대가 향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고 하루를 정리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향은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오늘의 나를 설명하는 가장 밀도 높은 언어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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